서론: 화려한 황금의 성, 바빌론의 위용과 갑작스러운 종말

고대 세계에서 ‘바빌론’이라는 이름은 부와 권력, 그리고 문명의 정점을 상징했습니다. 유프라테스 강변에 세워진 이 거대한 도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공중정원’과 하늘에 닿으려 했던 ‘에테메난키(바벨탑의 모델)’ 지구라트로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539년, 이 철옹성 같던 제국은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에 의해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왜 우리는 바빌론의 멸망에 주목해야 하는가?
바빌론의 멸망은 단순한 국가의 패망을 넘어, 수천 년간 지속된 메소포타미아 토착 세력의 주도권이 인도-유럽어족인 페르시아로 넘어가는 거대한 문명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바빌론의 사례를 통해 내부 분열이 국가의 운명에 미치는 치명적인 영향과 외교 전략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전성기와 균열의 시작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영광
바빌론의 마지막 전성기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느부갓네살) 치세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이집트를 격퇴하고 유다 왕국을 정복했으며(바빌론 유수), 바빌론을 당대 최대의 도시로 재건했습니다. 성벽의 두께는 전차가 마주 보고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두꺼웠고, 청색 타일로 빛나는 이슈타르 문은 침입자들에게 경외감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나보니두스의 등장과 내부 갈등
네부카드네자르 사후, 제국은 급격한 정치적 혼란에 빠졌습니다. 마지막 왕인 나보니두스(Nabonidus)는 종교적 혁신을 꾀했는데, 이것이 멸망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는 바빌론의 주신인 ‘마르두크’ 대신 달의 신 ‘신(Sin)’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바빌론 내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마르두크 사제 계급과의 정면충돌을 의미했습니다.
나보니두스 왕은 통치 기간 중 10년 동안이나 수도 바빌론을 비우고 아라비아의 테이마(Tayma) 거주지에 머물렀습니다. 이는 국가의 중요한 축제인 ‘아키투(신년 축제)’를 중단시켰고, 민심은 크게 이반되었습니다.
키루스 대왕의 침공과 오피스 전투
페르시아의 부상
바빌론 내부가 종교 갈등과 경제적 침체로 흔들릴 때, 동쪽에서는 키루스 2세(Cyrus the Great)가 이끄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가 급격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키루스는 피정복민에 대한 관용 정책을 펼치며 이미 민심을 얻고 있었습니다.
결정적 한 방: 오피스(Opis) 전투
기원전 539년 가을, 키루스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바빌론으로 진격했습니다. 바빌론 군대는 티그리스 강변의 오피스에서 저항했으나 처참히 패배했습니다. 이 승리로 바빌론 성벽 외부의 방어선은 사실상 모두 무너졌습니다.
| 비교 항목 | 신바빌로니아 군대 | 페르시아 제국 군대 |
|---|---|---|
| 지휘관 | 벨샤자르 (태자) | 키루스 대왕 |
| 주요 전술 | 성벽 방어 및 수성전 | 기동력 및 심리전, 공학적 접근 |
| 군사적 상태 | 내부 분열로 사기 저하 | 정복 전쟁 승리로 고취된 사기 |
실전 역사 분석: 바빌론 성벽은 어떻게 뚫렸나?

물줄기를 돌린 기막힌 전략
바빌론 성벽은 난공불락이었습니다. 그러나 키루스는 정면 대결 대신 공학적인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페르시아 군대는 바빌론 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유프라테스 강의 상류를 운하로 돌려 수위를 낮췄습니다.
- 강바닥 침투: 수위가 무릎 높이까지 낮아지자, 페르시아 병사들은 강바닥을 통해 성문 아래로 잠입했습니다.
- 내부 응응: 이미 나보니두스에게 반감을 가졌던 마르두크 사제들과 시민들이 성문을 열어주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 벨샤자르의 잔치: 성경(다니엘서)에 기록된 것처럼, 도시 내부에서는 적이 침입하는 순간에도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을 정도로 방비가 허술했습니다.
결국 바빌론은 큰 유혈 사태 없이 페르시아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나보니두스는 포로로 잡혔고, 바빌론의 독립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멸망 이후: 키루스 원통과 해방의 역사
인권의 시초, 키루스 원통
바빌론을 정복한 키루스는 이전의 정복자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파괴와 약탈 대신 ‘해방’을 선포했습니다. 이를 기록한 것이 바로 ‘키루스 원통(Cyrus Cylinder)’입니다. 여기에는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바빌론에 끌려왔던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성전을 재건하게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바빌론의 점진적 몰락
페르시아 점령 직후 바빌론이 즉시 폐허가 된 것은 아닙니다. 페르시아의 중요 거점으로 유지되었으나, 이후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과 사후 후계 전쟁을 거치며 중심지가 셀레우키아로 옮겨졌고, 결국 서기 7세기 무렵에는 모래 속에 파묻힌 유적지로 변모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바빌론의 성벽은 정말 무너뜨릴 수 없었나요?
당시 바빌론의 성벽은 이중, 삼중 구조로 되어 있어 공성퇴나 사다리로는 공략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페르시아가 강물을 돌리는 기발한 전략을 쓰지 않았다면 수년간의 봉쇄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Q. 나보니두스 왕은 왜 마르두크를 버렸나요?
역사학자들은 나보니두스의 어머니가 신(Sin) 신의 여사제였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하며, 중앙 집중적인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기존 사제 계급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던 정치적 시도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Q. 성경에 나오는 ‘벽에 쓰인 글씨’ 사건은 사실인가요?
다니엘서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상징이 섞여 있습니다. 벨샤자르가 실제 섭정 왕으로서 바빌론을 통치했다는 사실은 고고학적(나보니두스 연대기 등)으로 증명되었으나, 벽의 글씨와 같은 초자연적 현상은 신학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결론: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바빌론의 멸망은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균열이 더 무서운 적임을 보여줍니다. 화려한 겉모습과 난공불락의 요새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층의 실정과 국민과의 소통 부재는 제국을 속절없이 무너뜨렸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조직이나 국가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는 내부 결속과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유연한 대응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바빌론의 사례는 시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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